서승신 (Seungshin Seo)
2023 Humphrey Fellowship Program for Journalists
KBS

풀브라이트는 운명, 30년 만에 이룬 꿈과 자부심  

내가 풀브라이트 연수에 지원한 동기는, 저널리즘의 본고장 미국에서 언론을 제대로 한번 공부해 보고 싶다는 뒤늦은 학구욕 때문이었다. 취재기자로 20년 넘게 현장을 누비며 기록한 기사와 리포트, 다큐멘터리들이 “과연 저널리즘 원칙에는 맞을까?”라는 고민이 적지 않았기 때문이었다. 이달의 기자상과 방송기자상, 방송대상 등 여러 언론상을 수없이 받았지만, 그러한 고민은 경력과 연차가 쌓일수록 더 깊어져 갔다.  

 ‘풀브라이트’라는 이름을 처음 접한 건, 내가 대학교 2학년 때이던 1992년 어느 가을날이었다. 친구와 함께 유학 준비를 하면서 미국 대통령 선거 영상을 보기 위해 어학 연구소를 찾았다가 조교에게 들은 게 전부였다. 하지만 그때는 나와 전혀 상관없는 장학금, 영어가 특출난 학생들만 지원하고, 그 중에서도 운 좋은 몇몇 학생들에게만 기회가 돌아갈 거라는 편견 때문에 더 이상 염두에 두지 않았다. 또 1년 뒤 유학이 아닌 다른 길을 선택하면서 기억에서도 점점 사라져 갔다. 하지만 2022년 한 게시판에 공고가 뜨면서 다시 운명처럼 다가왔고 30년 전의 꿈을 이루기로 마음먹었다.  

 쉰 살 안팎의 영어 공부는 허리 디스크 질환을 재발시킬 정도로 고된 도전이었고, 가뜩이나 적은 머리숱에서 하나 둘 떨어지는 머리카락은 거울 보기가 싫을 정도로 스트레스였다. 하지만 그러면 그럴수록 합격에 대한 열망은 한층 더 커갔고 나 자신을 더욱 채찍질하고 있었다. KBS 전주에서 정치팀과 토론프로그램을 담당하는 기자이자, 10대 초반의 세 아이를 둔 아빠로, 대학원에서 석사과정을 밟고 있던 나는 일상이 전쟁이었고, 10분 단위로 스케줄이 짜여 있는, 전혀 여유를 찾을 수 없는 50대였다. 하지만 그 무언가를 찾기 위해 스케줄 가운데 일부를 희생할 용기는 있었다. 아이들의 놀아달라는 성화에도 주말과 휴일을 몽땅 도서관에 쏟아붓기로 한 것이다. 합격으로 보상받겠다는 일념 하나로…  

 내 1년 간의 풀브라이트 생활은 중부에 위치한 캔자스대학에서 두 달 동안 영어연수를 받고, 남서부 애리조나주립대 월터크롱카이트 저널리즘 스쿨에서 열 달 동안 험프리 펠로우로 참여하는 것이었다. 풀브라이트 장학생은 미국 어디에서든 환영과 축하를 받았다. 앞선 두 대학은 물론 각종 세미나와 워크숍, 컨퍼런스를 주최하는 여러 대학에서도 뜨거운 반김을 받았다. 그리고 우리들을 위한 그들의 준비는 모두 훌륭했다. 기후변화 관련 워크숍을 열었던 오하이오대학교에서는 그 대학에 재학 중인 풀브라이트 석·박사 장학생들을 모두 불러 교류의 시간을 마련해주고 커다란 파티까지 열어주었다. 풀브라이트 장학생의 존재는 대학들에서도 큰 자랑거리이자, 각종 평가에서 가점을 받을 수 있는 기회이기 때문이었다.  

 풀브라이트 장학생은 대학 밖 일반 기관과 단체들에서도 환영 받았다. 장학생은 대부분 입국 후 몇 달 안에 미국 통장과 소셜 번호 등을 개설하거나 만들어야 하는데 미국 국무부가 후원한다는 ‘DS-2019’ 서류를 가져가면 축하한다는 말과 함께 익스프레스 라인(express line)에 설 수 있도록 배려해 주었다. 가족들과 여행할 때도 곳곳에서 주민과 관광객들로부터 축하 인사와 덕담을 들었다. 뉴욕과 LA, 워싱턴, 필라델피아, 샌프란시스코, 그랜드캐년, 옐로우스톤 등을 다닐 때마다 그런 순간이 자주 이어졌는데, 그때마다 가장으로서 어깨가 으쓱해지는 자부심을 느낄 수 있었다. 나는 저널리즘 스쿨을 다니면서 다큐멘터리를 만들고, 공영방송 PBS에서 프로듀서로도 일을 했는데, 그때도 풀브라이트 장학생이라는 존재는 인물을 섭외하는데 신분을 증명할 수 있는 만능 보증수표였다.  

 풀브라이트는 나에게 자녀들로부터 직업적 자부심도 지킬 수 있는 기회도 주었다. 과거 십여 년 전 ‘안기부 도청록’ 사건이 우리나라를 뜨겁게 달군 적이 있었다. 그때 나는 제주도에서 근무하고 있었고, 평소 아주 존경해 마지않던 퇴임한 모 대통령 측으로부터 강연을 취재해달라는 요청을 받았다. 그때 나는 강연과 함께 도청록에 대해서도 취재하기로 마음먹고 퇴임한 대통령과 얘기를 나누고 있었다. 강연에 대해서는 명쾌한 대답과 인터뷰를 받았지만, 도청록에 대해서는 자꾸 언급을 회피해 전혀 취재할 수가 없었다. 결국 나는 존경하는 대통령을 끈질기게 따라다니며 질문을 했고 이 영상을 뉴스로 만들어 방송했다. 기자로서의 사명감이었다 

 3년 전 어느 날, 나는 초등학생이던 딸과 장래 희망에 대해 얘기할 기회가 있었다. 의사와 변호사, 과학자, 유튜버, 교사 등 여러 직업의 장단점을 설명하고 의견을 나누었다. 그러면서 문득 아빠 직업인 기자에 대해서는 어떻게 생각하는지 물었다. 충격적이게도 딸의 눈에 비친 기자는 ‘스토커’였다. 앞서 말한 뉴스를 내가 딸에게 언젠가 보여준 적이 있었는데, 딸은 기자라는 직업을 스토커라고 생각하고 있었던 것이었다. 설명 또한 명확했다. 사람이 싫다는데 계속 쫓아다니며 질문하는 건 나쁜 행동이고 스토커와 전혀 다르지 않다는 것이었다. 살이 떨리고 심장이 쿵 내려앉으며 하늘이 노래지는 걸 내 인생에서 처음 느껴본 순간이었다. 진짜 쥐구멍이라도 있으면 숨고 싶고 거의 실신할 지경이었다.  

 하지만 풀브라이트는 이걸 치유할 기회도 주었다. 올해 3, 나는 연수 주제인 기후변화와 신재생에너지를 공부하기 위해 MIT가 주최하는 에너지 컨퍼런스에 다녀오기로 했다. 애들 미국학교의 봄 방학과 겹쳐서 가족들 전체가 워싱턴부터 필라델피아, 뉴욕, 보스턴까지 동부 해안을 따라 여행하기로 했다. 먼저 첫 방문지인 워싱턴에서 ‘내셔널 몰’ 인근에 숙소를 잡고 포토맥강을 따라 산책하기로 했다. 그런데 그때 내 눈에 놀라운 광경이 들어왔다. 워터게이트 콤플렉스, 즉 그 유명한 워터게이트 호텔과 상가가 있는 복합 건물이 우뚝 서 있었다. 말로만 듣던 워터게이트 사건의 현장이 내 눈앞에 펼쳐진 것이다. 나는 애들과 서둘러 건물로 들어섰고 국가기념물이라는 간판을 배경으로 여러 사진을 찍어댔다. 나는 아이들에게 워터게이트 사건을 자세히 설명하며, 세계 최강 미국 대통령조차 기자의 취재로 사퇴해야 했던 역사를 알려주었다. 기자는 진실을 밝히는 존재라는 것을 강조했다. 또 호텔 관계자의 도움을 받아 당시 상황에 대한 상세한 설명도 들었다. 아이들은 귀를 쫑긋거리며 듣다가 인터넷으로 관련 내용을 찾아보고 또 여러 포즈로 사진을 찍기 시작했다. 그러면서 그 주인공들이 아빠와 같은 직업의 기자라는데 놀라워하고 있었다. 기자라는 직업의 중요성을 깨닫기 시작한 것이다. 그날 이후, 아이들은 아빠의 직업을 자랑스럽게 여기게 되었다 

 풀브라이트 연수를 마치고 한국으로 돌아온 지 어느덧 5개월째. 나는 여전히 전 세계 90여 개국 110여 명의 험프리 동기들과 소셜미디어를 통해 안부를 나누고, 기후변화 관련 지식과 정보를 공유한다. 그 시절의 아름다운 추억과 네트워크를 소중히 간직하고 싶기 때문이다. 그리고 무엇보다 기쁜 건 아이들에게 이제 더 이상 내가 ‘스토커’가 아닌 ‘자랑스러운 기자 아빠’로 기억된다는 것이다. 풀브라이트는 나와 내 가족에게 꿈과 자부심을 동시에 안겨준 기적 같은 선물이자, 30년 만에 이룬 운명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