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가혁 (Gahyeok Lee)
2021 Humphrey Fellowship Program for Journalists
JTBC
누구나 한번쯤은 낯선 환경에 나를 세워두고, 객관적으로 나를 바라보고 싶을 때가 있습니다. 10년 넘게 언론계에 종사해오면서 저 역시 그런 갈증을 느꼈습니다. 때마침 공무원들에게는 익히 잘 알려진 Fulbright Humphrey Fellowship Program에 2021년 대상자 중견 저널리스트도 선발한다는 소식을 들었습니다. 팬데믹의 공포가 한창이었던 때. 먼 타지에서 생활하는 것에 대한 우려도 컸지만, 그 우려보다 새로운 환경에서 한 차원 더 성장하는 기회를 갖고 싶다는 욕구가 더 컸습니다. 주저없이 지원하였고, 감사하게도 장학생에 선발되어 제 인생에서 가장 기억에 남을 만한 소중한 1년을 보낼 수 있었습니다.
전세계에서 모인 Humphrey Fellow들은 University of Kansas에서 두 달간 Pre-Training을 받았습니다. 미국 대도시나 유명 관광지는 몇 차례 가본 경험이 있지만, ‘오즈의 마법사’, ‘프레리 평원’으로만 들었던 낯설고 조용한 캔자스에서의 두 달은 ‘서울에서의 익숙함’을 순식간에 떨쳐버리게 하는 기간이었습니다. 8주 동안의 Pre-Training 기간 동안 Fellow들은 각자 전문분야에 관한 연구를 바탕으로 주제 발표를 준비해야했고, 그 대미를 장식하는 것이 프레젠테이션이었습니다. 대학시절 이후 영어로 무언가를 발표해본 경험이 없어 걱정이 컸지만, 그런 낯설로 어려운 환경에 스스로 몸담아 보겠다는 게 바로 저의 결심이었습니다. 다시 한국으로 돌아갈 수도 없는 노릇이었습니다. 저는 JTBC <뉴스룸>의 팩트체크 코너를 진행하며 가졌던 의문점을 바탕으로 라는 주제 발표를 했습니다. 한국 최초로 국제팩트체킹네트워크(International Fact-Checking Network) 인증 언론사로 공신력을 확보한 JTBC <뉴스룸> 팩트체크 사례를 소개했고, 언론계에 종사하는 Fellow 뿐만 아니라 이공계, 의료보건계에 종사하는 다른 나라 Fellow들이 관심을 기울였습니다.
대평원 캔자스에 이어 10개월 동안 본격적으로 Fulbrighter로서 생활할 곳은 Arizona의 Phoenix 였습니다. 피닉스 공항을 빠져나왔을 때의 충격을 잊을 수 없습니다. 이미 캔자스에서부터 TV 뉴스를 틀면 늘 ‘더위 위험 지역’으로 피닉스가 나오던 터라 각오를 했지만, 뒷목에 따갑게 내리쬐는 햇살을 맞으니 말문이 막혔습니다. 낮기온이 섭씨 50도에 육박한 건조한 사막기후. 어쩌면 서울에서 대평원 캔자스로의 극적인 전환보다 캔자스에서 피닉스로의 전환이 저에겐 더욱 큰 충격으로 다가왔습니다. 하지만 분명 그 충격은 걱정이나 두려움보다 설렘과 기대로 채워진 것이었습니다.
피닉스 다운타운에 있는 Walter Cronkite School of Journalism and Mass Communication at Arizona State University는 이름부터 제 구미를 당겼습니다. 방송기자이자 앵커로 활동한 저로서는 ‘미국의 앵커’로 불리는 월터 크롱카이트라는 이름이 붙은 학교 건물에 드나드는 자체가 기분좋고 설레는 일이었습니다. 크롱카이트 스쿨은 한국의 저널리즘 스쿨과는 달리 철저히 실전 중심의 커리큘럼으로 채워져 있었습니다. 곧바로 현업 부서로 투입되어도 될 만큼 이론적인 연구뿐만 아니라 카메라, 편집, 기사 작문, 현장 취재 등 실습을 저학년 학부생부터 가르치고 있었습니다.
Fulbright Humphrey Fellowship Program은 중간급 전문가(Mid-Career Professionals)를 선발하기 때문에 배우기만 하는 것이 아니라, 자신의 전문지식을 나누는 역할도 합니다. 때마침 미국에서는 한국문화가 일부 젊은층 뿐만 아니라 사회 전반에서 인기가 높아졌습니다. 넷플릭스 시리즈 ‘오징어게임’을 시작으로 BTS, 블랙핑크 같은 K Pop 아티스트들이 미국 공중파 인기 모닝쇼에 자주 등장할 정도였습니다. 덕분에 저 역시 Cronkite School 저학년 학부생들을 대상으로 Korean Culture and Korean Journalism에 관해 특강을 할 기회를 가질 수 있었습니다. 학생들 중 상당수는 미국 영토 밖으로 나가본 적도 없는 경우도 많았습니다. 하지만 ‘오징어게임’에 나오는 ‘무궁화 꽃이 피었습니다’ 게임의 멜로디를 모두가 흥얼거릴 정도였습니다. 학생들은 한국의 공영방송인 KBS와 JTBC의 채널 성격이 어떻게 다른지, 넷플릭스 등 OTT를 통해 JTBC가 글로벌 소비자와 어떤 소통을 하고 있는지 등 깊이 있는 질문을 했습니다. 특강이 끝나고 한 학생이 찾아와 “저는 손흥민 선수의 팬인데, 한국에서 손흥민의 인기는 어느 정도냐”며 여러 질문을 하기도 했습니다. 한국에서 온 Fulbrighter로서 자랑스러운 한 장면입니다.
Fulbrighter로서 피닉스에서 생활하는 동안 어쩌면 평범한 미국 시민들보다 미국 사회의 구석구석을 살펴볼 기회가 더 많았습니다. 멕시코 국경 수비대를 찾아가 직접 대원들의 업무 공간을 살펴보고, 세관 통관 절차를 세밀하게 살펴볼 수도 있었습니다. Fellow들과 함께 지역 구호기관에서 구호물자 패키징 자원봉사를 하면서 미국의 취약계층의 현실도 들여다볼 수 있었습니다. 사회 현상 모든게 언론의 취재 대상이자 저널리즘의 연구 대상이라는 관점에서 보면, 강의실을 벗어난 이 모든 활동이 결국 발품을 팔며 연구활등을 하는 것과 다름없었습니다.
연구 활동만큼이나 기억에 남는 것은 미국 서부 광활한 대자연을 사랑하는 아내, 두 딸과 함께 여행한 것입니다. 학문 연구를 충실히 하는 것 못지 않게 미국 문화와 대자연을 충분히 감상하고 즐기는 것이 Fulbrighter의 특권이자 의무라 생각합니다. ‘애리조나’하면 흔히 손꼽는 그랜드캐년은 단연 웅장했지만, 한국 관광객에게 널리 알려지지 않은 세도나(Sedona)는 ‘예기치 않은 선물’ 같은 곳이었습니다. 미 서부의 Red rock과 Cactus, 소소한 공예품과 친절한 상인들과 주민들을 잊을 수 없습니다.
Fulbrighter로서 보낸 1년 동안 무엇이 가장 좋았느냐? 흔히 친구나 직장 동료들에게 받는 질문입니다. 무언가 한마디로 답변하기 참 어렵습니다. 1년이라는 결코 짧지 않은 시간 동안 통째로 삶의 터전을 옮기는 것은 분명 골치 아프고 어떤 면에서는 비효율적이라 여겨질 수도 있기 때문입니다. 하지만 분명한 것은 그 1년이 평생 써먹을 수 있는 인생의 소중한 자양분이 됐다는 점입니다. 얼마전 캔자스에서 함께 지냈던 몽골 출신 Fellow가 서울을 방문해 함께 남산타워에 올랐습니다. 한국과 몽골에 살던 두 사람이 미국 캔자스의 시골마을에서 친분을 쌓고, 몇 년 후 서울에서 다시 만나다니. 그리고 몇 주 뒤면 피닉스에서 저희 가족에게 ‘My family’라고 부르던 이웃이 한국을 방문합니다. 벌써부터 이들과 서울 곳곳 어디를 방문하면 좋을지 생각하면서 다시 피닉스의 추억이 떠오릅니다. 추억과 설렘, 우정을 만들어준 Fulbright에 감사드립니다. 한국 풀브라이트 프로그램 75주년을 축하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