양지혜 (Jihea Yang)
2022 Humphrey Fellowship Program for Journalists
Chosun Ilbo
미국 국무부가 주관하는 풀브라이트 장학 프로그램은 자타공인 세계 최고 권위를 자랑합니다. 미국 대학원 진학을 준비하던 친구들이 풀브라이트 장학생으로 선정됐을 때 뛸듯이 기뻐하던 모습을 여러 번 봤습니다. 그들이 풀브라이트 일원이 된 것을 진심으로 축하하고 기뻐하면서도, 대학교 졸업 이후 바로 기자 일을 시작한 저는 풀브라이트와 인연 맺는 날이 없을 줄 알았습니다. 험프리 저널리스트 장학 프로그램이 신설되면서 저도 혜택을 누렸습니다. 처음 합격 소식을 들었을 때, 광활한 미지의 세계로부터의 초대장을 받은 것 같아 가슴이 걷잡을 수 없이 뛰던 그 느낌을 평생 잊지 못할 것입니다.
미국 정부가 운영하는 장학 프로그램에 선발됐다는 사실에 남다른 자부심과 운명적인 신묘함까지 느끼게 되는 배경엔 저의 가족사가 한 몫 할 것입니다. 제 외할머니는 황해도 안악 출신입니다. 천석꾼은 함부로 이름도 못 내민다는, 재령평야 자락의 풍요로운 마을로 안악 3호분 같은 고구려 벽화고분을 비롯해 문화유산이 산재해 있던 고장입니다. 교육열도 남달라 일제강점기에도 심지 굳게 민족의식을 고취하며 숱한 독립운동가를 배출했습니다. 6·25 전쟁이 터지기 전까지만 해도 할머니는 철없고 해맑던 7남매의 막내딸이었습니다. 그런데 갑자기 전쟁이 발발하면서 가족들이 빈 손으로 부산에 피난을 와야 했고, 그 사이 일가의 남자들이 전부 증발해버린 것은 물론 언니들도 네 명이 죽었습니다. 이 참극 속에서 할머니가 목숨을 건진 건, 미군의 도움이 결정적이었다고 합니다.
구체적인 지명이 어디인지는 모르겠으나, 외할머니가 피난 도중 북한 인민군과 중공군이 포위한 마을에 갇혔던 때가 있었다고 합니다. 주인 모를 텅 빈 집에 몸을 숨기고 벌벌 떨고 있는데, 우연히 창 밖으로 교회 십자가가 보였다고 합니다. 당시엔 종교가 없던 할머니는 “저를 살려 주시면 평생 당신을 믿고 사랑하겠노라”고 절박하게 기도했다고 합니다. 그 순간 기적적으로 미군의 폭격기가 나타났고, 포위된 도시에 있던 사람들의 목숨을 구했다고 합니다. 그 이후 할머니는 독실한 기독교인이 되었고 제가 어릴 적부터 자주 말씀하셨습니다. “고마운 미국 덕분에 우리가 목숨을 건졌어.”
그래서인지 제가 미국 정부가 주관하는 풀브라이트 장학생이 되었다는 소식에 외할머니가 뛸 듯이 기뻐하셨습니다. 외할머니는 미국에서 지내는 동안 어디에서든 한국전쟁 참전용사비가 보이면 꼭 묵념을 해달라는 당부를 했고, 저는 그 약속을 빠짐없이 지켰습니다. 본격적인 프로그램 시작에 앞서 2개월간 영어 연수를 했던 캔자스 대학교에는 캠퍼스 한복판에 한국전쟁 참전 추모비가 있었습니다. 추모 명판에 새겨진 이름들을 하나씩 읽어보며, 그렇게나 많은 학생이 이름모를 나라를 위해 피를 흘렸다는 사실에 전율했습니다.
이 밖에도 메이저리그 경기를 보러 놀러갔던 위스콘신주 밀워키나 링컨의 묘지를 참배하기 위해 갔던 일리노이주 스프링필드, 트루먼 대통령 기념관을 방문하려고 갔던 미주리주 인디펜던스 등 여행이나 견학을 갈 때마다 한국전쟁 추모비와 마주쳤고, 저는 이름모를 용사들의 희생과 헌신에 매번 감사 기도를 했습니다. 뉴욕에서도 자유의 여신상이 내려다보이는 배터리 파크 한복판에 한국전쟁 참전 추모비가 있고, 수도 워싱턴 D.C.의 한국전쟁 참전 기념공원엔 실제 미군들이 움직이는 것처럼 판초 우의를 입고 정찰하는 모습의 조각상들이 전시되어 있는게 매우 인상적이었습니다. 물론 제가 애리조나주립대(ASU)에서 공부할 때도 11월11일 참전용사의 날에 피닉스 북쪽에 있는 참전용사 추모공원을 방문해 생면부지 나라의 사람들을 위해 기꺼이 싸워준 분들의 넋을 기렸습니다. 그렇게 추모할 때마다 제가 매일 누리는 자유가 결코 거저 얻어진 것이 아니라는 사실을 가슴에 되새겼습니다. 이런 사람들의 희생 덕분에 자유를 얻었으므로, 나 역시 다른 사람들의 자유를 열렬히 보호하는 일에 힘써야겠다는 사명감이 샘솟았습니다. ASU 언론대학원에서 저널리즘 공부를 즐겁게 몰입해서 할 수 있었던 것도 이러한 이유 덕분일 것입니다.
무엇보다도 전 세계를 아우르는 풀브라이트 프로그램 덕분에 세계 각지의 친구를 얻었습니다. 이 자리를 빌려 다시한번 진심으로 감사드리는 일입니다. 베를린 장벽이 무너지기 전 기자 일을 시작해, 지금은 라트비아를 대표하는 저명한 주간지 편집장인 넬리야나 벨라루스의 독재자 루카셴코의 비위를 폭로하는 탐사전문기자로 명성을 쌓다 체포될 위기에 몰려 폴란드로 망명나온 카테리나 등이 대표적으로 풀브라이트가 맺어준 인연입니다. 목숨걸고 취재하고 기사썼던 체험담을 줄줄이 이야기해주는 동료들과 ASU에서 10개월 동고동락한 경험은, 저의 세계관과 시야의 폭을 한껏 확장시켜주었습니다.
험프리 저널리스트 장학 프로그램을 통해 감사한 기회를 누릴 수 있었으니, 계속해서 기자로서 앞으로 사회에 도움이 되는 기사를 많이 쓰는 것이 제가 받았던 혜택을 조금이나마 되갚을 수 있는 길이라고 생각합니다. 누구든 성별이나 나이나 출신 배경이나 그 무엇에도 구애받지 않고 각자가 뜻하는 바를 마음껏 펼칠 수 있는 세상을 만드는 데 조금이나마 보탬이 되도록 노력하겠습니다. 풀브라이트 프로그램이 1년간 제게 선사해줬던 경험들은 북극성처럼 앞으로의 여정에 길잡이가 되어줄 것입니다.